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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위인

윤봉길의사의 유언과 유서그리고 시

by 명경심 2019.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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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가 남긴 유언과 유서를  중심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윤봉길의사는 독립이 되기 전까지는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글을 남기고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상해로 떠났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 오지 않는다.

 

윤봉길의사가 두아들에게 남긴 유언글이다.

윤봉길의사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기개. 인품. 식견을 느낄 수 있는 글이다. 

너희도 万一(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朝鮮(조선)을 위해 勇敢(용감)한 鬪士(투사)가 되어라.

太極(태극)의 旗[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敎養(교양)으로 成功者(성공자)를 東西洋(동서양) 歷史上(역사상) 보건대 東洋(동양)으로 文學家(문학가) 孟軻(맹가 - 맹자)가 있고

西洋(서양)으로 佛蘭西(불란서) 革命家(혁명가) 나푸레옹(나폴레옹)이 있고 美國(미국)에 發明家(발명가) 에듸손(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의사가 홍커우 공원 의거(상해의거)를 감행하기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을 사전 답사하며 쓴 시가 남겨져 전해오고 있다.

윤봉길의사의 시

신공원을 답청(踏靑)하면서

 

처처(凄凄)한 방초(芳草)여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왕손(王孫)으로 더불어 오세

청청(靑靑)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일성(放砲一聲)으로 맹세하세

윤봉길의사는 홍커우 거사후 일본경찰 취조 자술서에서

 “상해 신공원의 식장을 미리 조사하러 갔을 때 내가 밟은 잔디가 그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것도 있고, 또다시 일어서는 것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인간도 또한 강한 자로부터 유린되었을 때 이 잔디와 하등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단히 슬픈 감정이 샘솟아 났다. 그 감정을 유서로 썼다.”

라고 밝혔다고 한다.

 

거사를 앞둔 윤봉길의사의 심경을 잘 드러냈으며 빼어난 문체로  시인으로서의 윤봉길의사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 윤봉길 유서 중 동포에게 보내는 글

 

 

 

 

윤봉길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사나이로서 해야 할 일을 했으니 떳떳하다."

 


윤봉길의사의 사형은  1932년 12월19일 아침 7시27분  집행되었다.

 

 사형집행 당일 윤봉길의사의 최후의 모습

 

윤봉길의사는 끝까지 대장부로서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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