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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위인

안중근의사 순국109년 단지동맹과 독립운동. 유해는 어디에?

by 명경심 2019. 3. 13.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안중근의사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안중근(안응칠): 한말 독립운동가

▶출생

1879년 9월 2일(음력7월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과 모 배천조씨(조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때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해서 아명을 응칠이라 하였다.

 

▶안중근의사의 성장배경

안중근의사 가문은 고조부 때부터 해주, 봉산, 연안 일대에 많은 전답을 장만하여 황해도에서 이름난 부호가문으로 알려져 부친때까지 이어졌다.  
조부 안인수는 진해 현감을 지냈으며, 부 안태훈은 성균진사로 1884년 안중근의사 6세때 부친 안태훈 진사는 박영효가 주도하던 개화파에서 일본에 파견할 70명의 유학생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나 그 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였다.

 


안중근의사는  조부의 훈도로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안중근의사는 말타기와 활쏘기등 무예를 익혀 호연지기를 길렀고 사격술이 뛰어나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안중근의사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으며 16세인 안중근의사도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안중근의사의 한말독립운동 시대적 배경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안중근의사는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통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상해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한다.

 

안중근의사의 계몽운동

 

 안중근의사는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안중근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 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다.

안중근 의사는  이동휘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 갔다.

 

 

▶안중근의사의 단지동맹과 국외 독립운동

 

안중근의사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강순기,정원주.박봉석.류차홍.조순응.황병길.백규삼.김백춘.김천화.강창두,엄인섭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네이버지식백과-(단지동맹회원명단은 안중근의사가 끝까지 밝히지 않아 정확하지 않음)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김태훈은 이완용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2001년 광복회는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단지동맹 유지비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건립하였다. 

 

1909년 10.24일 안중근의사는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우편열차를 타고 남행, 채가구(지야이지스고)역 도착하여 이토 히로부미 저격거사에 관해 논의하였다.

 

▶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1909년 10월 26일, 이토히로부미 저격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9시 30분 안중근의사는 러시아 의장대 사열 후 일본 환영단으로 향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을 발사하여 모두 명중시켰다.


이때 러시아 군인이 덮치자 권총을 떨어뜨리고 “코레아 우라”를 세번 외쳤다.

이토히로부미  10시에 절명함.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의거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거행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 일본의 불공정한 재판과 유해인도 거부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했으나 일본은 허가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와 가마타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안중근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언도 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안중근의사의 유언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안정근(安定根)·안공근(安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안중근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순국하였다.

 

동양평화를 유언으로 남기고 뤼순(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안정근과 안공근이 안중근의사의 유해 인도를 요구하나 감옥 당국으로부터 거부당하였으며 뤼순(여순)감옥옆 공동묘지에 묻혔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안중근의사 유해 찾기’가 본격화 되었지만, 두 차례 유해찾기 발굴 작업에도 발견하지 못했다.

 

 

 

 

안중근의사가 순국한지 109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안중근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2019년 3.1일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는 북측과 공동으로 안중근의사의 유해발굴을 다시 추진한다고 밝혔습니다.

 

안중근의사 순국109년 ......

 

하루빨리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조국에 안장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자료-안중근의사 기념관. 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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